재력이 상당한 집안에서 태어난 선생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부모님, 특히 자당의 총애를 받았다고 들었다.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대처로 나가 신의주 「제일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수학한 다음, 일본 유학—야마구치현(山口縣) 소재 고쇼(鴻城)중학교—을 거쳐, 신의주 「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소싯적에 일본 유학에 나섰던 걸 보면 물적 토대도 토대려니와, 신문물에 개방적인 환경이 일찌감치 조성되었던 것 같다. 1945년, 경성제국대학에서 개명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여 대학원 과정까지 마쳤다. 서울대학교가 배출한 제1회 졸업생이었다.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경기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숭실대학교와 인연을 맺은 건 1956년의 일이었다. 잠깐 숙명여자대학교에 교수로 재직한 기간도 있지만, 숭실대학교에서 30년 넘게 재직한 후 1991년 2월 정년을 맞아 퇴임하였다. 숭실대에서는 문리대(현 인문대) 학장과 대학원장의 보직을 맡았고, 학계에서는 철학연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학구의 의지가 남달라 미국 아이오와주립대학, 노스웨스턴대학을 비롯하여,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프랑스 파리1대학에 연구차 체류하기도 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1989년에는 미국 린치버그대학에서 정규학기 강의를 맡기도 했다.선생의 연구는 크게 두 축으로 양분할 수 있다. 르네 데카르트(와 앙리 베르그손) 연구가 하나이고, 에른스트 카시러 연구가 다른 하나다. 요즘에는 전문연구자들의 수가 많아졌지만, 선생께서 활동하던 때만 하더라도 연구인력 풀이 좁았다. 선생은 국내 데카르트(와 베르그손) 연구와 카시러 연구의 기초를 다지고 선도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번역서도 많이 냈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같은 철학의 고전을 비롯하여,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과 『자유에의 증언』(J.S. 밀), 『서양철학사』(S.P. 램프레히트), 『서양사상사』(C. 브린튼), 『앙띠 오이디푸스』(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같은 주목할 만한 책을 다수 번역, 젊은이들의 지적 갈증 해소에 일조했다. 『앙띠 오이디푸스』는 그에게 제9회 서우철학상(번역 부문, 1997)을 안겨주었다.
개인적인,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선생께서 연구차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떠날 즈음이었다. 내가 막 석사를 마쳤을 때다. 호출을 받고 찾아뵈었더니 대뜸 당신께서 담당하던 강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기호논리학」(2학년 과목), 「데카르트」(3학년), 「분석철학」(4학년), 이 셋을 놓고 고르라는 거였다.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 끝에 결국 「기호논리학」을 맡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숭실대학교에서 맡은 첫 전공과목 강의였다. 전공 강의를 하게 되어 뿌듯하기도 했지만, 선생께 인정받고 신뢰받는다는 느낌에 더 기뻤다. 개인적으로 그 학기는 기호논리학을, 더 학습할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마스터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기회였다.
선생께서 파리1대학에 방문학자 신분으로 체류할 때였다. 마침 나도 독일에 머물던 때여서 파리 거처로 찾아뵈었다. 사모님은 미국 큰따님에게 다니러 갔다면서 선생 혼자 계셨다. 여러 날 선생을 따라 이곳저곳 명소를 둘러보았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이었다. 걸인들이 드문드문 길가에 나앉아 있었다. 선생은 내게 말했다. “집사람은 저런 사람들 보면 그냥 지나치질 않아.” 사모님을 대신하려는 듯, 선생은 그중 한 사람 앞으로 허리를 굽혔다.
아호 ‘허원’(虛遠)은 선생의 단짝 조요한 선생의 작품이었다. 조 선생께 들은 얘기다. 이순을 목전에 둔 어느 시점, 조 선생께서 선생의 저서 『허무와 영원』(1980)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서 지었다. 별호의 친근함에 더하여, 옛 선비들의 아취를 느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평안도와 함경도 태생의 동갑내기 직장동료로서 순탄치만은 않았을 두 분의 우정은 금란지교(金蘭之交)의 그것이었다 할 것이다.
“천진하고 오만한 스승”
선생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차갑고 날카로워 보인다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반만 맞는다. 나도 그랬다. 학생과 교수라는 관계 때문이기도 했을 터이지만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조교를 하면서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모실 수 있었다. 그동안 가졌던 차가운 이미지가 봄눈 녹듯 녹아내렸다. 가끔은 콧노래도 흥얼거리던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천의무봉(天衣無縫), 매인 데 없이 소탈했다. 웃을 때 짓던 표정은 영락없는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개구쟁이 같기도 하고 세상 시름 같은 건 1도 없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은 많은 부분 선생의 형형한 눈빛과 마른 체격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의 눈은 광채가 났고 기운이 넘쳤다. 허튼소리를 할 수 없도록 상대방을 압도했다. 그는 테니스를 즐겼다.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운동으로 다져졌기 때문일 터, 군살 같은 것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담백하고 절제된 삶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종의 ‘기호’였다.
훤칠한 키에 늘어진 어깨, 바람에 날려 헝클어진 긴 은발, 허리춤에 두 손을 얹은 채 교정을 느릿느릿 걷는다. 돌부리에 걸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다. 한참을 걷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걸음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본다. 늘 그렇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던, 상도동의 몇 안 되는 ‘명장면’ 중 하나였다. 시인 권영진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천진하고 오만한 스승”이었다.
천생 철학자
선생은 주저라 할 『의미의 철학』(1977)에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다뤘던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물었다.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의 ‘삶’이야 짐승도 예외가 아니거늘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는 거였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을 향해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역설했다. 자기 자신을 비판의 법정에 세우는 성찰하는 삶의 권면이었다. 그런 원칙에 충실했던 그였기에 ‘철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아 설령 무죄 방면한다고 하더라도 그 같은 조처는 따르지 않을 터였다. 그런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허원 선생이 그랬다. 그의 철학적 화두는 ‘잘 삶’이었다. 소크라테스와 다르지 않았다. 선생은 숭실대학교의 ‘소크라테스’였다. 아테네의 그이처럼 ‘철학’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분이었다. 천생 철학자였다.